인도네시아 정보화연수 지원활동
정광규
1. 출발하기
2005년 정부는 16개 시․도별로 개발도상국을 선정하고 컴퓨터 지원과 함께 정보화연수를 지원을 지원하는 개발도상국 정보화 지원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우리 충청북도 교육청은 인도네시아를 지원하기로 하고 반텐주 교육청을 선정하였다.
올해는 두 번째 지원에 나서는 것으로 작년의 100대의 컴퓨터 지원에 이어 올해에는 400대의 컴퓨터 지원과 함께 연수 지원에 나서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2005년 첫 번째 지원 사업에 참여하기로 하였다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하여 참여를 못하고 이번에 처음 참여하게 되었다. 유치원생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계층에 강의 경력이 있는 나로서는 외국 선생님들께 강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자체가 나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인천에서 15시 4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 탑승을 위하여 청주에서 10시경 버스로 출발하였다. 출발 할 때 도교육청 교육정보화과 이평균, 고웅식 장학관님 등 모든 장학사님들이 환송을 나오셨다.
적도의 열대 지방 여행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출발했다.
인도네시아는 우리나라의 남서쪽에 위치한 나라로 자카르타까지는 비행기로 약 6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는데 우리 나라와 2시간의 시차가 있어 도착하였을 때는 6시가 조금 넘었고 주변이 어둑어둑 해진 후였다.
2. 도착 첫날
9월 3일 출발하여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 도착하였을 때는 우리 나라가 한창 늦더위에 시달리던 때라 인도네시아의 기온이 오히려 약간 시원하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자카르타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땅게랑이라는 곳에 위치한 우리의 숙소인 임페리얼 호텔을 찾았다. 호텔 정문에서 청원 경찰의 검문을 받았다. 통과 차량의 아래쪽까지 거울로 비추어 보며, 트렁크 문을 열고 확인하였고, 입구에서는 개인의 가방까지도 열어 확인하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도네시아의 국내 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림 1) 호텔의 잘 꾸며진 정원
3. 연수 강의 활동
작년의 연수가 주로 인터넷이나 MS-Office 프로그램을 주로 강의하였던 반면에 이번에는 주로 컴퓨터 언어나 우리 나라 프로그램을 강의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선정된 것이 Namo- Webeditor, Hangul 2002, LOGO, TANGRAM이었다. 그리고 우리 도에서의 ICT활용 교육 현황 등을 소개하기로 하였다.
그림 2) 강의에 집중하는 선생님들의 모습
우리가 연수를 진행할 곳은 우리의 숙소가 있는 땅게랑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세랑이라는 곳에 위치한 한 직업고등학교였다. 세랑은 반텐주의 주청이 있는 곳이나 그 크기는 아직 우리 내수 정도의 크기로 작았지만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으며 새로운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곳이다.
우리를 처음 맞이한 학교의 오엔 교장은 학교의 자랑을 하였다. ISO인증을 받았다는 것과 교육 시설이 어느 학교보다 훌륭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연수 시설은 열악하기 짝이없었다. 준비되었다던 빔프로젝터 등 연수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으며, 컴퓨터 시설 또한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물론 우리의 잣대로 잿을 경우다. 그들의 협조로 연수는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림 3) 한대의 컴퓨터에 여러 선생님이 같이 연수
국산 나모 웹 에디터의 연수를 통하여 홈페이지를 만들었는데 그들은 인터넷과 홈페이지에 대한 개념은 있었지만, 실제 인터넷 속도가 모뎀을 활용하기 때문에 거의 활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이메일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개인 홈페이지를 작성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러나 나모 웹 에디터를 매우 흥미 있게 배웠으며 일부 선생님들의 마지막 연수 결과 시연 모습은 매우 훌륭했다. 학교 홈페이지를 만들어 보겠다고 의욕을 보이는 선생님이 몇 분 계셨다.
4. 인도네시아의 자연
인도네시아는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며 우리 나라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그 자연을 말하기 힘들지만 자바 섬의 바텐주 지역을 중심으로 우리가 방문했던 지역을 보고 체험한 것을 말하면 늘 30도 내외의 기온에 후텁지근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방문한 9월은 건기의 막바지로 이제 곧 우기로 들어선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여름은 건기이고 겨울은 우기인 셈이다.
자카르타에서 세랑까지는 자동차로 2시간 정도의 거리인데 주변에 산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처음 평야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평야지대에서 마음껏 농사를 짓고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평야지대를 일주일 동안 연수 강의를 위해 출퇴근하면서 많은 것을 평야 지대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나의 생각일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달라질 수도 있으며 더군다나 전문가의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평야 지대는 우리 나라 산간지역보다 더 천수답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건기와 우기가 있어 물 걱정은 하지 않겠지만 모든 지역이 평평한 곳에서의 관개는 정말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논 지역에서 도랑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저수지 또한 보이지 않았다. 평야 지대는 물이 잘 흐르지 않기 때문에 물들이 깨끗하지 않고 썩어가고 있었다.
고속 도로 주변의 논에서는 모내기를 하는 곳과 벼 탈곡을 하는 곳이 있었는데 마을 별로 모내기 시기를 같이 잡는 것 같아보였다. 우리 나라의 두레와 품앗이 같은 것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마을 별로 심는 시기와 거두는 시기가 같기 때문에 어떤 지역은 일제히 모를 심고 어떤 지역은 거두고 하였다.
아직도 개상질을 하여 벼를 터는 모습이 나의 초등학교 시절을 보는 듯했다.
5. 인도네시아의 문화
인도네시아에는 300개의 언어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공용 인도네시아어가 있으며 각종 메스미디어의 도움으로 표준어가 어느 정도 정착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문자는 아랍 문자를 사용했으나 이제는 알파벳을 받아들여 각종 간판 및 프랑카드는 알파벳으로 되어 있었다. 다만 읽는 방식이 네덜란드의 식민지 영향으로 영어식이 아닌 독일어 식으로 되어 발음이 좀 다르다.
인도네시아는 대부분이 무슬림이지만 타 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이지 않다고 하며, 이슬람교가 국교가 아니라고 한다. 다만, 종교가 다른 경우 결혼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의 문화 중 화장실 사용이 좀 독특한데, 뒤처리를 물로 씻은 다음 왼손으로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연수를 실시한 학교는 1,500명의 학생이 생활하는 곳으로 화장실이 학생용으로 6개 정도 보였다. 남자 화장실이나 여자 화장실이나 덜렁 변기만 있기 때문에 남녀화장실의 구분이 없었다. 변기 옆에는 시멘트로 만든 가로 세로 높이 약 50센티미터의 물통이 있고 물 주걱이 있어서 뒤처리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왜, 인도네시아에서는 종이로 뒤처리를 하지 않고 물로 씻어내었으며 왼손으로 그 일을 감당하게 했을까? 이는 아마도 연중 고온의 날씨에 언제나 샤워를 할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물로 씻지 않았을까 생각되었다.
6. 인도네시아 학교
인도네시아의 교육 제도는 우리 나라와 똑 같았다. 6,3,3,4제인 것이다. 교육비 부담도 우리 나라와 같은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초 중등의 경우 무료이고 고등학교 이상은 별도로 수업료를 징수하고 있는 것으로 교장과의 대화에서 알 수 있었다.
그림 4) 인도네시아 좁은 학교 운동장에서 달리기 체육수업이 이루어지도 있다.
우리가 연수한 학교는 세랑 제1직업학교였는데, 인도네시아는 학교의 이름을 이렇게 번호로 짓는다고 한다.
세랑 제1직업학교는 내가 스쳐지나가면서 본 다른 학교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는데, 모든 건물들이 1층으로 되어 있으며, 운동장은 매우 좁다. 농촌지역의 학교는 특히 일반 주택과 차이가 없어 아이들이 많이 모여 있으면 그 곳이 학교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가 학교에 도착하는 시간이 8시 20분 경인데 이 때 이미 정규교육은 시작되었는데 더운 날씨를 피하여 아침에 일찍 시작하는 듯 했다. 세랑 제 1직업 학교는 다른 학교에 비하여 굉장히 큰 학교로 교실은 모두 1층으로 넓은 공간이 흩어져 있고 이를 모두 회랑으로 연결했다. 이는 아마 건기에는 더운 햇빛을 가려야 하고 우기 때에는 날마다 비가 오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림 5) 교실은 모두 1층이고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7. 인도네시아의 여학생
세랑 제1직업학교는 본래 여자상업고등학교였다고 한다. 그런데 몇 년 전에 학교 이름을 모두 번호로 고쳐 제1직업학교가 되었다고 한다. 옆의 학교는 제2직업학교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 학교는 1,500명의 학생 중 95%가 여자였고 남자는 가끔 보였다. 혼성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녀 간의 대화는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우리 나라 청소년들처럼 그 속에서 누구는 누구의 애인이고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같이 지내는 5일 동안 거의 매일 교복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교장의 설명에 따르면 졸업생의 대부분은 직장으로 진출하고 10% 정도가 대학에 진학을 하고 15% 정도는 어떤 진로로 나가는지 학교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 나라에서 보듯이 불량한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행동거지도 모두 순진해 보였다.
처음 우리를 본 학생들의 반응은 약간 신기함 그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호기심은 점점 커져만 갔으며, 3일이 지난 다음에는 우리의 말에 약간씩 반응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날 9월 10일에는 아침에 한 동안의 소동이 있었다. 여핵생들이 드디어 그들의 호기심을 발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 여학생은 영어를 매우 잘하여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사인을 해 주기를 바랐으며 심지어는 핸드폰으로 사진 촬영을 하자고 졸랐다.
그림 6) 낯선 외국인과 사진찍기를 꺼리지 않았던 여학생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인 공세에 시달렸다. 처음 사인을 요구한 학생들 그룹은 아마도 그 학교에서 선두 그룹일 것이다. 영어 매우 잘 하였으며 얼굴이나 차림새 또한 부티가 나는 그룹이었다. 그 다음에 사인을 요구하는 그룹은 가난하지만 용기 있는 자들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모양새는 초라하지만 새로운 정보를 얻고자 하는 학생들.........
여학생들의 핸드폰 소지율은 10% 정도 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인도네시아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같이 존재하다는 말을 실감나게 하는 것이었다. 인도네시아의 핸드폰 사용은 주로 문자 메시지를 이용한다고 한다. 잘 사는 사람에게도 통화료가 부담이 되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많은 사람들이 핸드폰을 소지 하고 있었는데 그 것의 대부분이 노키아 제품이라는 것이 조금 서운했다.
8. 돌아오기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악수를 할 때 그 행동이 여러 가지라고 한다. 처음 만나면 그저 손이 닿는 정도로 악수를 한다. 조금 더 반가우면 두 손으로 악수를 한다. 조금 존경스러우면 악수 후에 오른손을 그의 가슴에 살짝 댄다. 아주 존경스러우면 악수를 하면서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등을 그의 머리에 댄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이 악수를 한 후에 자꾸 손이 가슴으로 옮겨지며 악수할 때에 머리를 갖다 대는 행동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많은 보람을 느꼈다. 가정이나 학교에 컴퓨터가 없으면서도 컴퓨터를 잘 다루는 그 선생님들을 보면서 인도네시아의 미래가 밝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우리가 1980년대 후반 컴퓨터도 없이 컴퓨터 연수만 있으면 어깨 너머로 배우기 위해 쫒아다니면서 열정적으로 자율 연수를 했듯이 그들도 곧 시작을 하겠지.............
우리가 뿌린 교육 정보화의 씨앗이 잘 자랄 것이라고 확신을 한다. 이 사업은 정말 우리 나라를 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정보화 연수 참여로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인도네시아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들의 화장실 문화가 결코 우리에게 뒤떨어진 문화가 아니다. 이제야 우리는 비대를 사용하여 그들을 흉내내고 있지 않은가!
내년에도 이루어질 정보화 연수가 기다려진다. 그들의 날씨는 참기 어려운 후텁지근함이었으나 그 속에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아직 때묻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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